2024.11.26 (화) 마태복음 19:16-22
찬송가 196장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인간의 힘으로 불가항력적인 고통은 어쩔 수 없더라도 인간이 만들어내는 고통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런 고통 앞에 나는 왜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인간의 탐욕에 대한 해답은 공감입니다. 사람들에게 ‘부’란 하나님 복의 증거로 삼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본문의 부자청년은 어떤 면에서는 최악의 신앙인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재물 소유의 정도’가 아니라 ‘재물 나눔의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갔습니다. 이로써 청년의 실존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청년은 자기가 재물을 소유한 줄 알았겠지만 결국 재물이 그를 소유한 것입니다. 재물이 그를 집어삼킨 것입니다. 기독교는 ‘나눔’을 말하는 종교입니다. 소유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신앙은 나눔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이 생명을 내어주신 것처럼 말입니다.